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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택트 (The Conqueror, 1956) – 낙진에 사로잡힌 영화: 출연진 91명 중 46명 암으로 사망

by 권보 2025. 6. 2.

할리우드는 촬영 중의 사고, 섬뜩한 우연, 특정 작품과 관련된 이상한 현상들에 낯설지 않다. 그러나 The Conqueror(정복자) (1956)의 이야기는 그 어떤 것보다 가슴 아프고 조용히 공포스럽다. 오늘은 콘택트 (The Conqueror, 1956) – 낙진에 사로잡힌 영화: 출연진 91명 중 46명 암으로 사망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콘택트 (The Conqueror, 1956) – 낙진에 사로잡힌 영화: 출연진 91명 중 46명 암으로 사망
콘택트 (The Conqueror, 1956) – 낙진에 사로잡힌 영화: 출연진 91명 중 46명 암으로 사망

 

존 웨인과 수잔 헤이워드가 주연한 이 역사 드라마는, 흥행 성적이나 비평이 아닌,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건강에 끼친 참혹한 피해로 인해 ‘저주받은 영화’로 기억된다.

이 영화는 미국 유타주의 사막, 과거 핵 실험장이 있던 지역 근처에서 촬영되었다. 제작에 참여한 220명의 인원 중 91명이 암에 걸렸고, 그중 46명이 암으로 사망했다. 이는 주요 배우와 감독, 촬영 스태프를 포함한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인재(人災)였을까? 이번 글에서는 The Conqueror 제작 과정에서 벌어진 불길한 진실, 방사능 지역에서의 촬영이 초래한 건강 피해,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 유령 같은 유산에 대해 알아본다.

 

 

낙진 속에서 촬영된 영화: 방사능에 물든 촬영지
이 비극은 영화 촬영지를 유타주 세인트조지 인근 사막으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붉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이국적인 풍경으로, 몽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설정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 지역이 1950년대 초 미 정부가 핵 실험을 진행했던 네바다 테스트 사이트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실제로, 영화 촬영 2년 전만 해도 이 지역에서는 11차례의 핵 실험이 있었다. 낙진(방사능 먼지)은 수백 마일 떨어진 곳까지 퍼졌고, 세인트조지의 토양, 공기, 물은 여전히 오염된 상태였다.

감독 딕 파웰과 프로듀서 하워드 휴즈는 이 위험을 무시했거나 인지하지 못한 채, 존 웨인, 페드로 아르멘다리즈, 애그니스 무어헤드 등 200여 명의 배우와 스태프를 이곳으로 데려가 수 주간 촬영을 강행했다. 그들은 이 오염된 지역에서 야영하고, 일하며, 심지어 오염된 모래를 캘리포니아 스튜디오로 가져와 재촬영을 하기도 했다.

당시 오염 수준은 안전 기준을 수백 배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건강 영향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선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지만, 이후 벌어진 일들은 소름끼칠 정도다.

 

 

끔찍한 여파: 암에 쓰러진 출연진과 스태프

영화 개봉 이후 수년이 지나자, 출연진과 스태프들 사이에서 암 진단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존 웨인: 폐암과 이후 위암까지 앓다 1979년 사망.

수잔 헤이워드: 1975년 뇌암으로 사망.

애그니스 무어헤드: 1974년 자궁암으로 사망.

페드로 아르멘다리즈: 1960년대 초 말기 암 진단을 받고 1963년 자살.

감독 딕 파웰도 영화 촬영 7년 후 암으로 사망했다.

전체 출연진 및 제작진 중 약 40% 이상이 암을 경험했다는 것은 통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치이다. 미국 암학회는 이 수치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보고, 방사능 노출이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를 단 한 차례도 시행하지 않았다. 당시 핵 실험과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과 건강 정보의 투명성 결여는 많은 피해자 가족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책임과 낙인: 저주받은 유산

제작자 하워드 휴즈는 이 영화가 낳은 결과에 심각한 죄책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생애 마지막 몇 년간 The Conqueror의 모든 필름을 구매하여 회수하고,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1,200만 달러 이상을 들였다. 이 조치는 영화 촬영지에 대한 그의 고집과 책임감에 대한 반성으로 해석된다.

그는 이후 세상과 단절된 은둔자의 삶을 살게 되었고, 많은 전기작가들은 이 영화가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후회 중 하나였다고 분석한다.

오늘날에도 The Conqueror는 영화계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로 언급된다. 예술과 환경, 정치가 교차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저주받은 영화’로 간주된다. 단순한 오컬트적 저주가 아닌, 실제 인간의 실수와 과학적 무지로 인한 비극이라는 점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이 영화는 냉전기의 수많은 핵 실험 피해자들,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유사 사례를 떠올리게 하며, ‘화려한 영화 제작’ 뒤에 가려진 침묵 속의 희생을 상기시킨다.

 

 

낙진 위에 쓰인 유산
The Conqueror는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잊힌 영화일지 모르지만, 그 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단순한 흥행 실패를 넘어서, 출연진의 절반 가까이가 암으로 사망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는 영화 역사상 가장 어두운 장 중 하나로 남는다.

이 영화는 예술적 가치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무서운 현실적 피해로 회자되고 있다. 이는 단지 영화가 아니라, 핵 실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인간의 무지가 남긴 끔찍한 결과였다.

오늘날 이 영화를 되새기며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The Conqueror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한 세대를 울린 경고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고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