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다 귀로 먼저 느껴지던 ‘방송국 감성’
텔레비전을 보던 시절, 우리는 방송국 로고보다 먼저 음악으로 방송국을 구분했다.
오늘은 귀로 기억하는 방송국: KBS, MBC, SBS의 테마송과 시그널 음악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어린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 나오는 짧은 시그널,
드라마 시작 전 고지멘트와 함께 흐르던 BGM,
심지어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삽입되던 방송사 테마송까지.
"이 프로그램은 KBS 2TV에서 제공해 드립니다",
"MBC 문화방송입니다",
"SBS, 함께 만드는 기쁨" 같은 안내 멘트가
특유의 음악과 함께 나오면 우리는 자동으로 어떤 방송사인지, 어떤 분위기일지를 인지하곤 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세대의 감성 코드로 작동했다.
지금은 OTT가 대세가 되며 점점 사라지는 이 감성들,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KBS, MBC, SBS의 감성적인 시그널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자.
KBS: 공영방송의 정통성과 안정감의 상징
KBS는 시그널 음악부터 성우 멘트까지 엄격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강했다.
특히 KBS1과 KBS2의 분위기 차이가 명확해서, 음악만 들어도
"아, 지금은 뉴스야" 혹은 "이건 예능이겠구나" 하는 감이 자연스럽게 왔다.
▶ 고요한 클래식, ‘국민의 방송’ 이미지
KBS의 대표 시그널 음악은 클래식 기반의 고풍스러운 멜로디가 많았다.
예를 들어 뉴스 9의 시그널 음악은 오케스트라풍의 웅장한 분위기로
공영방송의 권위를 드러냈고,
"이 프로그램은 KBS 2TV에서 제공해 드립니다"는 멘트는
정갈하고 포멀한 목소리의 성우가 딕션 좋게 또박또박 말하던 톤이 특징이었다.
▶ 어린이 프로그램과 ‘투니버스와는 다른 감성’
KBS는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다소 교육적인 톤을 유지했으며,
애니메이션 또한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성우도 대부분 중저음 위주의 포근한 목소리가 많았고,
일요일 아침 ‘디지몬 어드벤처’, ‘카드캡터 체리’ 등의 방영 시
그 오프닝 전 짧게 흘러나오는 KBS 시그널은
아이들에게 “이제 시작이야!”를 알리는 신호였다.
▶ '다큐멘터리 3일', '인간극장' 등의 감성 시그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KBS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시그널 음악은
잔잔한 피아노나 현악기 선율이 주를 이루며
정서적인 안정과 깊이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MBC: 드라마와 예능의 강자, 감성 사운드의 교과서
MBC는 90년대~2000년대 중반까지
드라마, 예능, 시트콤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방송사다.
자연스럽게 그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하는 음악적 아이덴티티도 강했다.
▶ “MBC 문화방송입니다” – 익숙한 멘트의 고정 BGM
짧은 관현악 시그널 뒤에 등장하던
“MBC 문화방송입니다”라는 멘트는
거의 모든 프로그램 앞뒤에 삽입돼 있었다.
이 짧은 시그널조차도 세련되면서도 약간 감성적인 멜로디를 가졌기 때문에
MBC 특유의 정서적 접근법을 엿볼 수 있었다.
▶ 시트콤과 예능 속 배경음악, 효과음의 명가
‘세 친구’, ‘논스톱’, ‘거침없이 하이킥’ 같은 시트콤에서 사용된
배경 음악과 시그널 효과음은 MBC의 정체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MBC는 프로그램 전용 시그널 BGM도 많았지만,
장면 전환 시 사용된 효과음이나 오프닝 시그널도 각인되었다.
예능 ‘무한도전’의 오프닝 음악,
‘우리 결혼했어요’의 로맨틱한 시그널 사운드도
프로그램 정체성과 방송사 정체성을 동시에 만들어냈다.
▶ 더빙 성우의 개성도 MBC의 감성
MBC 성우극회는 상대적으로 톤이 다양하고 자유로운 연기가 많았다.
‘달려라 하니’의 하니 목소리, ‘검정고무신’의 기영이 목소리는
그 자체로 MBC라는 방송사의 색깔을 드러냈다.
SBS: 세련됨과 실험정신의 상징, 도시적인 시그널
1991년 개국한 SBS는 KBS, MBC와는 다른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내세우며
시그널 음악 역시 다소 모던하고 감각적인 느낌이었다.
▶ “SBS, 함께 만드는 기쁨” – 도시적인 음색
SBS 시그널은 로고송이나 멘트 모두
광고 CM송에 가까운 트렌디한 구성을 사용했다.
"함께 만드는 기쁨, SBS"라는 멘트가
피아노와 신디사이저 기반의 음악과 함께 흐르면,
다른 방송국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 드라마 OST와의 강한 연계
SBS는 ‘천국의 계단’, ‘올인’, ‘별에서 온 그대’ 등
화제성 있는 드라마 OST를 방송 시그널과 연계하는 방식도 잘 활용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삽입된 음악은
SBS만의 세련된 브랜딩 효과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SBS는 감성 자극형 시그널 음악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 애니메이션 성우진의 색다른 배치
SBS는 애니메이션에서도 다소 이질적이고 개성 있는 성우 캐스팅을 시도했다.
때로는 너무 어른스러운 성우가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천하무적 크래쉬맨’, ‘은하영웅전설’ 등 개성 넘치는 더빙 연출이 가능했다.
‘소리’로 기억되는 방송사의 감성 자산
OTT가 주류가 되고, 유튜브가 세대를 사로잡은 지금,
방송국의 시그널 음악은 점점 사라져 가는 과거의 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그널들은 단지 음악이 아니라, 우리 감정의 스위치였다.
뉴스 시그널이 울리면 숙연해졌고,
드라마 시그널이 흐르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애니메이션 시그널이 나오면 당장이라도 TV 앞에 뛰어가 앉았다.
“이 프로그램은 KBS 2TV에서 제공해 드립니다”,
“MBC 문화방송입니다”,
“SBS, 함께 만드는 기쁨”이라는 멘트와 음악은
지금도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듣기 어려운 소리들,
하지만 결코 잊히지 않을 소리들.
우리의 감성과 시대를 담은 시그널 음악,
그 시절 우리가 TV 앞에서 함께 들었던 멜로디는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