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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후편 다 있어요!” 해적판 CD와 DVD 문화, 불법복제의 시대를 견뎠던 감성

by 권보 2025. 5. 29.

DVD 한 장에 담긴 ‘금요일 밤의 설렘’.
2000년대 초중반, 금요일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연스레 손이 가는 건 TV 리모컨이 아니라 DVD 플레이어였다.
누군가 학교에 몰래 가져온 지하상가표 DVD, 혹은 아버지가 퇴근길에 구입한 “3장에 만 원”짜리 최신 영화 패키지가

주말 저녁의 분위기를 좌우했다.

오늘은 “전편 후편 다 있어요!” 해적판 CD와 DVD 문화, 불법복제의 시대를 견뎠던 감성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전편 후편 다 있어요!” 해적판 CD와 DVD 문화, 불법복제의 시대를 견뎠던 감성
“전편 후편 다 있어요!” 해적판 CD와 DVD 문화, 불법복제의 시대를 견뎠던 감성

 

물론 그것들이 정식 출시된 정품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거친 프린트의 디스크 표면, 잘못된 한글 자막, “시네마 천국 제공” 같은 어색한 로고는
그것이 엄연히 ‘불법복제’ 또는 ‘해적판’임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 우리에게 그 디스크들은 단순한 불법이 아니라
감성이고, 문화였으며,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던 이들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통로였다.

 

 

 

길거리와 지하상가를 점령했던 ‘불법 콘텐츠 유통 시장’

2000년대 초반, 서울 명동·용산·동대문은 물론 지역 상권의 지하상가까지
해적판 CD와 DVD는 넘쳐났다.
두꺼운 책자에 플라스틱 커버를 끼운 정리파일 하나에 최신 영화 수십 편이 담겨 있었고,
판매상은 “이거 영화관보다 빨라요”, “전편부터 3편까지 다 있어요”라며 홍보를 이어갔다.

▶ 불법인지 몰랐던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처럼 스트리밍이나 합법 다운로드 플랫폼이 없던 시절,
많은 사람들은 단지 “편하게 집에서 영화 본다”는 이유로 구입했고,
그게 불법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경우도 흔했다.

게다가 일반 가정집 컴퓨터 CD 드라이브, 노래방 기기, DVD 플레이어에서 다 재생 가능하다는 편의성은
정식 루트를 찾을 필요성을 없애버릴 정도였다.

▶ 자막 오류, 화면 잘림, 캠버전도 감수하던 시절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DVD 중에는 영화관에서 캠코더로 몰래 촬영한 ‘캠버전’도 많았다.
화면 좌우에 사람 머리가 툭툭 지나가거나, 관객 웃음소리가 그대로 들어간 버전이 주말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스토리를 따라가고, 장면을 음미하며, 배우의 연기를 느끼곤 했다.

 

 

 

해적판 CD로 듣던 음악들, 그리고 mp3 이전의 감성

영화만큼이나 음악도 해적판 CD로 많이 유통되던 시기였다.
소녀시대, SG워너비, 동방신기, MC몽, 버즈, 에픽하이…
이들의 음반은 종종 컴퓨터 매장 구석이나 문방구 앞 진열대에 복사 CD 형태로 놓여 있었다.

▶ ‘BEST 100곡’이라는 이름의 미지의 플레이리스트
정체를 알 수 없는 DJ가 정리한 듯한 100곡짜리 MP3 CD는
가요, 팝, 힙합, 발라드가 뒤섞인 혼종 플레이리스트였다.
“DJ DOC 다음 트랙이 아바?” 같은 구성도 일상이었고,
가끔 자기 목소리로 “디제이 제이의 히트송 메들리~”라는 인트로가 깔린 트랙도 있었다.

▶ 아이리버, 코원, 옙 MP3에 담기 전, 그 출처는 해적판
많은 10대들이 mp3 플레이어에 음악을 담기 위해 해적판 CD에서 추출했다.
CD에서 음악 파일을 PC로 추출하고, 그걸 다시 MP3로 옮기던 복잡한 작업이
당시로선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루틴이었다.

정품 음원 사이트는 고가였고, 정기 결제 시스템도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불법 경로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던 시대였다.

 

 

 

DVD 컬렉션의 꿈과 자막 사이트의 황금기

해적판 CD나 DVD의 소비는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았다.
‘내 영화 파일 모으기’, ‘최신작 소장용 DVD 컬렉션’ 등으로
자기만의 미디어 아카이브를 만드는 행위로 발전했다.

▶ USB보다 CD가 ‘정리된 느낌’ 주던 시절
지금은 외장하드나 클라우드에 콘텐츠를 보관하지만,
그 시절에는 프린트된 DVD 표지를 케이스에 넣고, CD에 라벨을 직접 출력해 붙이는 과정 자체가 ‘덕질’이었다.
'반지의 제왕', '파이널 판타지', '다이하드 시리즈' 등은 DVD 케이스에 번호를 붙이고 즐겨 보던 이들도 많았다.

▶ 자막 사이트와 번역자 팬덤
당시 많은 해적판 영상은 정식 자막이 아닌 팬 번역 자막이 붙어 있었다.
“자막 by 영화자막넷”, “양철북 번역팀”, “명탐정Z” 같은 이름은 오히려 신뢰를 줬다.
어떤 자막 번역자는 자신의 스타일을 넣어 말투를 의인화하거나 유머 코드로 번역하는 등 팬층을 만들기도 했다.

자막 사이트 게시판에는 “이번 주 최신작 자막 언제 나오나요?” “이거 싱크 맞는 버전 올려주세요” 같은 글이 넘쳐났고,
자막 자체가 커뮤니티였고 문화의 일부였다.

 

 

 

불법이지만 문화였던, 모순된 시절의 기록.
해적판 CD와 DVD는 분명 불법이었다. 저작권 침해였고, 창작자의 권리를 훼손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필요에 의한 선택이자, 문화를 향유하는 유일한 경로였다.

정식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제한적이었고, 인터넷 속도도 느렸으며,
정보의 비대칭이 심하던 시절.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싶고, 음악을 듣고 싶었던 사람들은
지하상가로, CD 파일 정리함으로, 자막 번역 사이트로 향했다.

지금은 스트리밍과 정품 구독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고,
그때와 같은 해적판 문화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 시절의 DVD 하나하나에는 시대의 공기, 갈증, 감성, 그리고 문화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불법이라는 틀 안에서도 문화를 만들어내던 세대였다.
그건 부끄러우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