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거 정품이래!” 운동화가 계급이던 시절.
요즘은 운동화를 다양하게 신는다. 기능성 운동화부터 뉴트로 러닝화, 커스텀 스니커즈까지 선택지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중반, 운동화는 단순한 신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서열이었고, 존재감이었고, 패션 완성의 정점이었다.
오늘은 운동화 하나로 ‘신분 상승’ : 나이키 에어포스 1과 스케쳐스 D’Lites 열풍의 시대에 대해 알아볼 예정이다.
특히 교복 위에 매치한 한 켤레의 운동화는 교실 안 ‘패션 고수’ 인증서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인기를 끌었던 두 브랜드가 있다. 하나는 오랜 스니커즈의 아이콘, 나이키 에어포스 1,
그리고 또 하나는 독특한 실루엣으로 많은 이들의 ‘로망’이었던 스케쳐스 D’Lites(딜라잇츠).
이 글에서는 당시 이 두 운동화가 어떤 위치에 있었고, 왜 그렇게까지 열광했는지,
그 속에 숨어 있던 패션과 심리, 문화적 맥락을 되짚어보려 한다.
‘에어포스 1’: 교실의 왕좌를 차지한 하얀 운동화
2000년대 초, 나이키 에어포스 1(특히 올화이트 모델)은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운동화 판도를 뒤흔든 전설이었다.
무광 흰색 가죽에 두툼한 밑창, 나이키 스우시 로고 하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 정품 여부가 관건이던 시절
“저거 정품이야?”, “홍콩판 아니야?”라는 말이 일상 대화 속에 나올 만큼 에어포스 1은 명확한 ‘계급 기준’이었다.
정품이냐 아니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고, 발에 흰 에어포스 1을 신고 등교한 날은 묘한 자신감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 교복에도, 사복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 어울리는 디자인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어떤 옷과도 잘 어울렸고, 운동화 자체에 힘이 있어서 하의실종 패션, 교복 스커트,
트레이닝 팬츠 등과의 조화가 훌륭했다.
또한 신발 끈을 느슨하게 풀고 신고, 혀를 살짝 들춰 스타일을 주는 방식은 패션 감각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 ‘에어포스’는 그냥 신발이 아니었다
당시의 에어포스 1은 연애의 도구이자, 선물 1순위,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슈템이었다.
“걔가 걔 생일에 에어포스 사줬대” 같은 말은 한 학기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지만, 10대 시절 감정과 계급의 상징이 신발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스케쳐스 D’Lites’: 투박함 속의 큐트함, 그 ‘통굽’의 위엄
에어포스 1이 남학생들 중심의 스니커즈 전설이었다면,
스케쳐스 D’Lites는 여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통굽의 전설’이었다.
2000년대 초반, 화이트&블랙의 볼드한 실루엣에 두툼한 밑창, 둥근 앞코. 이 모든 조합이
‘귀엽다 + 키 커 보인다 + 있어 보인다’는 삼위일체 효과를 만들어냈다.
▶ 어글리슈즈의 원조급 존재
지금은 '어글리슈즈'가 트렌드지만, 당시 딜라잇츠는 시대를 앞서간 디자인이었다.
처음 봤을 땐 "왜 이렇게 투박해?" 싶지만, 점점 중독되는 묘한 매력.
발을 덮는 실루엣이 다리를 가늘게 보이게 만들고, 통굽이 키를 커 보이게 해 주는 마법의 조합이었다.
▶ ‘딜라잇츠 vs 케이스위스 vs 컨버스’ 3강 구도
여학생들 사이에선 딜라잇츠를 중심으로 운동화 3강 체제가 형성됐다.
깔끔한 컨버스, 단정한 케이스위스, 그리고 통통 튀는 개성의 딜라잇츠.
그중에서도 딜라잇츠는 ‘좀 꾸미는 애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고, 양말과 레그워머 조합으로 연출하는 방식도 인기였다.
▶ 사진에 꼭 들어가야 했던 ‘딜라잇츠’ 각도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라온 전신 사진이나 거울 셀카에도 발끝을 안쪽으로 모아 찍은 ‘딜라잇츠 각도’는 필수였다.
“저 신발 뭐지?” “딜라잇츠잖아, 진짜 예쁘다” 같은 댓글은 그 자체로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운동화 하나로 나를 설명하던 시절
운동화는 단순히 신고 다니는 ‘소비재’가 아니었다.
특히 교복 중심의 교실 문화에서는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성과 계급, 취향의 장치였다.
▶ 중고거래 사이트와 짝퉁의 성행
나이키 정품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G마켓, OK캐시백몰, 홍콩 직구 등 다양한 ‘우회로’가 성행했다.
짝퉁도 많았고, 때론 ‘짝퉁도 잘 고르면 멋지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정품 박스가 없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저거 짭 아냐?”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고, 나이키 로고 각도까지 분석하던 시절이었다.
▶ 운동화 끈, 양말, 밑창까지도 스타일의 일부
끈을 이중으로 묶거나 색깔 있는 끈으로 교체하는 등, 작은 차이가 스타일을 결정했다.
‘페이크삭스’와 ‘복숭아뼈 양말’ 사이에서 갈등하고, 밑창이 새하얘야 깔끔하다는 강박도 있었다.
즉, 운동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는 단순한 ‘신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드러내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스니커즈가 말해주던 나의 이야기.
지금은 에어포스 1도, 딜라잇츠도 모두 복각되고, 재출시되며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그 신발을 신던 감정은 지금과는 다르다.
그건 ‘예쁘다’, ‘편하다’가 아니었다.
“이 신발을 신으면, 나도 멋져 보일 수 있을까?”,
“이걸 신으면 나도 걔처럼 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었다.
한 켤레의 운동화로 자신감을 얻고, 친구와 비교하고, 질투하고, 칭찬받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감정도 툭툭 털고 지나갔던 시간.
우리 모두의 발끝에 남아 있던 추억,
그때의 에어포스와 딜라잇츠는 단순한 스니커즈가 아니라,
10대의 감정과 사회, 문화를 품은 작은 아이콘이었다.